책소개
작가의 자아와 독자의 자아가 서로 뒤엉키며 울림과 반향을 낳는 중편소설 <홀스토메르>는, 탄생(삶)에서 소멸(죽음)로 향하는 존재에 대한 기록이다. 이 작품은 1861년에서 1863년 사이에 이미 주된 내용이 집필되었다. 하지만 20년가량이 지난 1885년에 다시 쓰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듬해인 1886년에 모스크바에서 출간된 ≪톨스토이 작품집≫(5판)에 수록되었다. ‘어느 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홀스토메르>의 창작은 1860년대의 초반 작업과 1880년대의 후반 작업으로 대별된다. 1860년대의 초반 작업에서는 담백하고 확신에 찬 강한 어조로 세르푸홉스코이와 홀스토메르의 전성기, 그들의 화려하고 행복한 시절을 강조해서 묘사한다. 1880년대의 후반 작업에서는 사실적 어조로 세르푸홉스코이와 홀스토메르의 쇠퇴기, 그들의 늙고 추레한 시절을 강조해서 묘사한다.
톨스토이는 자동화된 우리의 의식에 일격을 가하는 ‘낯설게 하기 기법’으로(홀스토메르의 의식의 프리즘으로) 인간 사회의 부조리, 사회적 위법, 소유권의 문제, 사회적 강압, 심리적 강제와 폭행, 전횡, 박해 등을 표현하는 한편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 미와 추, 젊음과 늙음에 대한 성찰과 통찰을 드러낸다. 종국에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해독하지도 못한 채 허둥대며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불편하더라도 삶의 진실을 직시하도록 이끈다.
톨스토이의 예술 세계에서는 다른 시공간에 배치되고 정돈된 사물들과 주체들을, 젊음과 늙음, 미와 추, 선과 악, 삶과 죽음이라는 장(場)에 나란히 배열시킨다. 그리고 합(合)을 선명하게 도출해 내기 위해서 젊음과 늙음, 미와 추, 선과 악, 삶과 죽음을 대조시킨다. <홀스토메르>는 톨스토이의 여느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대조의 기법’ 위에 구축된다. ‘젊은 홀스토메르’와 ‘늙은 홀스토메르’의 대조와 더불어, ‘늙은 홀스토메르’와 ‘젊고 생기발랄하고 건강한 말 떼’의 대조도 나타난다. 이러한 대조는 도덕성의 문제, 선악의 문제, 기생충 같은 삶과 노동하는 삶의 문제를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면서 후기 톨스토이의 관념(идеа)과 이상(идеал), 나아가서는 그의 사상(идеология)까지도 표현한다.
온몸으로 굴곡진 삶을 살아내며, ‘붉은 분노’를 품은 채 역사를 밀고 나간 ‘한 인간의 실존적 아픔과 고통’을 형상화한 중편소설 <무엇 때문에?>의 집필은 1906년 1월부터 4월에 걸쳐서 이루어졌고, 1906년 모스크바에서 발간된 저서 ≪독서회≫에 처음으로 수록되었다. 이 작품의 주제와 대부분의 줄거리는 막시모프(С. В. Максимов)의 ≪시베리아와 강제 노동≫에서 취했다. 막시모프의 이 작품은 톨스토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1906년 2월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를 방문한 스타호비치(С. А. Стахович)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막시모프의 유명한 작품 ≪시베리아와 강제 노동≫을 읽어보았소? 강제 노동과 유형(流刑)의 역사적 묘사가 눈에 띄오. 한번 읽어보시오.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행동하는지, 짐승들도 정부가 하는 것처럼 그렇게 잔인하게 할 수는 없을 거요.”
유형을 당해 강제 노동에 처해진 폴란드인 미구르스키와 그의 아내 알비나는 실재했던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들 생애의 모든 비극적 이야기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이들의 이야기에다 인간이 처한 상황과 결부된 심리적 묘사를 도입한다. 그래서 이들은 민감한 영혼과 성정의 소유자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톨스토이는 국가(기구)의 억압과 강압의 희생양인 주인공들에 대한 아픔과 고통을 그려낼 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공감을 표출하고 있다. 저자는 ‘폴란드(인)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기 위해, 수많은 사료를 정밀하게 탐독했다. 특히 그는 1830∼1831년에 일어났던 폴란드 봉기와 관련된 문헌을 빌려서 연구하기도 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품 곳곳에 산재해 있는 폴란드 봉기와 관련된 다섯 문장을 쓰기 위해서 수많은 책을 정독해야만 했다.”
주체와 사회 사이, 개인과 국가 사이의 틈새를 여행하게 하는 <무엇 때문에?>에 나타난 19세기 폴란드인의 아픔과 고통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사회·경제적으로 불안한 21세기의 현실에서 자아를 웅크린 채로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의 아픔과 고통으로 치환되면서 ‘새로운 확장된 의미’를 창출한다. 우리는 이러한 아픔과 고통을 통해 ‘자아의 방기’로 나아가고 있는지, ‘자아의 단련’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한 번쯤 자문해 볼 일이다.
지금 이 시대의 사회적 직업이나 노동은 단순한 돈벌이나 물질적 재화 획득 차원을 넘어서 자아를 표출하고 자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기에, 사회적 직업이나 노동이 곧 ‘바로 그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인간의 자기 창출(human self-creation) 행위를 원하는 대로, 안정적으로 할 수 없는 실존적 상황에 처한 미구르스키를 보면서 그의 아픔과 고통, 불안과 절망을 실로 절감하게 된다. 아울러 ‘위험을 관리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픔과 고통, 불안과 절망도 ‘겹쳐서’ 읽게 된다.
200자평
러시아의 문호인 레프 톨스토이의 중편 소설 <홀스토메르>와 <무엇 때문에?>가 실린 책이다. <홀스토메르> 에서는 ‘남과 다름으로 인한 아픔’과 ‘늙고 병듦으로 인한 고통’이, <무엇 때문에?>에서는 거대한 국가적 폭력과 심리적 강압으로 인한 ‘한 인간의 실존적 아픔과 고통’이 나타난다. 톨스토이는 이 두 작품을 통해서 나와 다른 너도 ‘삶과 죽음’이라는 불변 항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타인의 아픔과 고통, 소외와 불안에 대해 외면하지도 눈감지도 말 것을 넌지시 주문한다.
지은이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828년 8월 28일(구력인 율리우스력에 따름)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과 마리야 톨스타야 백작부인의 넷째 아들로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심리 분석’과 ‘개인과 역사 사이의 모순 분석’을 통하여 최상의 리얼리즘을 성취해 냈다. 이 작가는 일상의 형식적인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거짓, 허위, 가식, 기만을 벗겨내고자 했다.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는 레닌의 말처럼, 톨스토이는 제정 러시아에서 혁명이 준비되고 있던 시기를 적확(的確)하게 묘사하면서, 그의 문학과 사상을 사회혁명에 용해시켰다. 나아가서 전 인류의 예술적 발전을 한 걸음 진전시키는 데 그의 문학과 사상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는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으면서 ‘삶을 사랑하는 톨스토이’와 ‘청교도적 설교자로서의 톨스토이’라는 ‘두 얼굴의 톨스토이’를 만난다. 톨스토이의 세계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운다. 후기로 갈수록 톨스토이는 ‘삶을 사랑하는 시인’에서 ‘인생의 교사’이자 ‘삶의 재판관’이 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우리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우는 그의 세계를 이원론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주제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전일성이 드러난 세계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사상가로서 톨스토이를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지 말고, 영적인 탐구심에 기초한 도덕적 태도의 통일성에 기초해서 그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그의 창작 세계의 전일성을 인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지난한 과정에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인간이다.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1864∼1869)에서 그는 이미 삶과 죽음에 대한 탐색을 통해 그 결론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가 탐색한 모든 것은 분명하고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삶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미학적 가치와 윤리적 가치를 연결시켜 죽음을 전형적 형상으로 표현하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전력을 다하여 그 일에 매진해서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9)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는 만족할 줄 모르는 예술가이자 인류의 설교자로서 삶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인류에게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톨스토이의 본성에는 건강한 육체에서 나온 강한 성적 욕망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성적 욕망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금욕주의와 청교도적 삶을 강조했다. 일상적 삶을 함께했던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야 안드레예브나는 남편의 강한 성적 욕망을 받아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망의 분출 이후 피할 수 없이 더 강하게 표출되곤 하던 청교도주의자 톨스토이의 모든 도덕적 부채까지도 견뎌내야만 했다. 그래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쓴 러시아의 문예학자 메레시콥스키는 톨스토이에게 평생 동안 억제하려고 했던 육체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정신적인 것을 성취해야만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자기에 대해 진술하는 과정을 통해 평생토록 자기 인식과 자기 확인을 지속하면서 위대한 작품들을 산출했다. 그 과정에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내부에 평온하게 숨 쉬고 있는 ‘자기 완결적인 신성의 형상’을 갈망했다. 하지만 일상적 삶에서는 늘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면서, 매 순간 도덕적·종교적으로 완전한 자아를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부정과 자기혐오에까지 치닫는 그의 정신과 조우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들떠 있는 그의 영혼, 도덕적 자기완성에 대한 이상으로 흥분된 그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 그의 중편소설 ≪신부 세르게이≫(1898)에서 이러한 것들을 확인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명성과 허영심을 불러일으키는 세속적 관념을 거부하고, 자신이 진리라고 규정한 관념을 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또 다른 자아라고 부를 수 있는 세르게이 신부가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톨스토이는 ‘노동의 진리’, ‘생과 사의 심원함’을 이른바 ‘문명 생활의 허위’와 ‘진리의 부재’ 등과 대비하면서 묘사한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자연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에 있으며, 허위는 문명적이고 의식적인 것에서 발견된다. 톨스토이의 이와 같은 관념은 이미 초기 중편소설 ≪카자흐≫(1863)에서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1873∼1878), ≪전쟁과 평화≫ 등에서 표출되고 있다. 그리고 장편소설 ≪부활≫(1899)에서 톨스토이는 당시 러시아의 사회제도 전반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와 동시에 민중의 삶에 동화하는 인간의 도덕적 부활의 전 과정을 예리하게 묘사했다. 이와 같은 작품들에는 인간의 원시생활의 진리, 문명의 허위, 사회생활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거짓과 기만이 형상화되고 있다.
옮긴이
강명수는 1965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했다. 1985년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 입학한 뒤 대학 생활의 절반을 <고대신문>에서 기획 면과 학술 면을 담당하며 보냈다. 동 대학원에서 체호프 후기 단편소설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아주어과(러시아어, 러시아 문화와 역사 담당)에서 강사, 전임강사를 역임했다. 그 후 러시아로 유학해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에서 <안톤 체호프의 사상적인 중편소설 연구: ‘등불’에서 ‘6호실’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에서 <가르신의 ‘붉은 꽃’과 체호프의 ‘6호실’에 드러난 공간과 주인공의 세계>라는 연구로 박사 후 과정(Post-doc.)을 마쳤다. 2005년까지 고려대학교(학부)와 중앙대학교(학부와 대학원)에서 러시아 어문학과 문화, 체호프와 톨스토이를 강의했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청주대학교 인문대학 어문학부 러시아어문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2013년부터 포항대학교 관광호텔항공과 교수로 있다.
체호프, 톨스토이, 가르신에 대한 주제로 30편의 논문을 권위 있는 전국 규모의 학술지에 게재했고,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체호프의 세계≫[개정판 ≪체호프와 그의 시대≫(소명출판, 2004)]라는 학술서를 번역했다. 체호프 선집(총 5권)을 기획하고, ≪체호프 선집 4-철없는 아내≫(범우사, 2005)를 번역했다. 체호프의 희곡 ≪벚나무 동산≫(지식을만드는지식, 2008)과 ≪갈매기≫(지식을만드는지식, 2011)를 번역했고, 톨스토이 말년의 걸작 ≪하지 무라트≫(지식을만드는지식, 2008)와 ≪위조 쿠폰≫(지식을만드는지식, 2009)도 번역했다. 아울러 톨스토이 서거 100주년을 맞아 펴낸 톨스토이 전집(총 12권) 중에서 후기 걸작들이 담긴 제9권 ≪중단편선IV≫(작가정신, 2011)를 번역했다. 또한 러시아어 교재 ≪쉽게 익히는 러시아어 2≫(공저, 신아사, 2007)를 출간했다.
체호프 연구 3부작 중에서 첫 번째 연구서 ≪체호프 문학의 몇 가지 쟁점: 우리 시대의 인간·현실·관념 읽기≫(보고사, 2009)를 출간했다. 두 번째 연구서 ≪체호프 다시, 깊이 읽기(A thorough re-reading of Chekhov’s works): 의복, 음식, 젠더, 공간, 시대≫(한국학술정보, 발간 예정)도 집필하고 있다. 체호프 연구 3부작의 마지막 연구서인 ≪체호프의 프리즘으로 러시아 문학 뒤집어 보기≫도 집필을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차례
홀스토메르
무엇 때문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중후하게 늙을 수도 있고, 추레하게 늙을 수도 있고, 가련하게 늙을 수도 있다. 때로는 중후한 동시에 추레하게 늙을 수도 있는데, 얼룩빼기 거세마는 바로 이 경우에 속했다.
-<홀스토메르> 중에서